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으로 바로가기

정보마당

평화와 자유를 사랑하는 세계인들 누구나
유엔참전용사의 희생에 감사하고 추모할 수 있습니다.

언론보도

유엔기념공원과 관련한 신문, 잡지 등의 "언론 보도기사 모음" 입니다.

2022.02.15 세계일보/ 중공군 맞선 네덜란드 중령의 희생, 6·25 역사를 바꿨다

 

 

중공군 맞선 네덜란드 중령의 희생, 6·25 역사를 바꿨다

 

2차대전 때 일본군에 붙잡혀 포로 생활도

중공군 기습에 횡성의 유엔군 ‘전멸’ 위기

자신을 내던져 아군의 무사 탈출을 돕다

부산 유엔묘지 묻혀 영원히 한국에 남아

 

 

6·25전쟁 도중 가장 치열했던 싸움인 횡성전투(1951년 2월 11∼13일)에서 전사한

네덜란드 육군의 마리누스 덴 오우덴 중령(1909∼1951). 유엔사 SNS 캡처.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2월 12일. 강원도 횡성에서 인해전술을 앞세운 중공군의 기습공격을 받은 미군 등 유엔군은 전멸할지도 모를 위기에 내몰렸다. 훗날 미국에서 ‘대학살의 계곡’(Massacre Valley)이라 불릴 만큼 인명피해가 컸던 횡성전투(1951년 2월 11∼13일)가 그것이다. 중과부적의 미군은 신속히 철수할 수밖에 없었고 당시 미 육군 2사단에 배속돼 있던 네덜란드 대대가 스스로를 희생해가며 미군과 한국군의 안전한 이동을 도왔다. 6·25전쟁에 참전한 유엔 회원국을 기리는 여러 전적비들 가운데 네덜란드 참전 기념비가 횡성에 위치한 이유다.

 

 

◆ 2차대전 때 일본군에 붙잡혀 포로 생활도

 

유엔군사령부는 횡성전투 71주년을 맞아 14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당시 네덜란드군의 활약상을 기리는 글과 사진들을 게시했다. 특히 횡성전투에서 전사한 뒤 부산 유엔묘지(현 유엔기념공원)에 묻혀 영원히 한국에 남은 네덜란드인 마리누스 덴 오우덴(1909∼1951) 육군 중령의 사연이 한국인들에게 깊은 감동을 선사한다.

 

유엔사에 따르면 오우덴 중령은 우리 육군사관학교에 해당하는 네덜란드 왕립군사학교를 졸업하고 1932년 당시 네덜란드 식민지이던 인도네시아(네덜란드령 동인도)에 배치됐다. 1941년 12월 진주만 공습을 시작으로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곧 인도네시아도 점령했고, 오우덴 중령은 동료 네덜란드 장병들과 함께 자바섬에 있는 포로수용소로 보내져 약 3년 반 동안 일본군의 포로 생활을 했다.

 

 

일제의 만행을 겪어 잘 아는 오우덴 중령이 훗날 일본 식민지에서 독립한 한국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싸우다 희생됐다는 점이 우리를 더욱 숙연하게 만든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인도네시아가 독립한 직후인 1950년 초 오우덴 중령은 네덜란드 본국으로 근무지를 옮겼다. 하지만 모처럼 안정된 삶을 맛본 것도 잠시, 한국에서 6·25전쟁이 터지고 네덜란드는 유엔 결의에 따라 파병을 결정했다. 2차대전 참전용사이자 실전 경험이 풍부한 그를 적임자로 여긴 네덜란드 정부는 중령으로 진급시켜 한국에 보낼 네덜란드 대대의 지휘를 맡긴다.

 

1951년 3월 8일 부산 유엔묘지에서 거행된 마리누스 덴 오우덴 중령의 장례식 모습(왼쪽 사진).

오른쪽 사진은 지금도 부산 유엔기념공원의 네덜란드 묘역에 남아 있는 오우덴 중령의 묘비. 유엔사 SNS 캡처

 

 

◆ 자신을 내던져 아군의 무사 탈출을 돕다

 

1950년 11월 부산항에 도착한 네덜란드 대대는 규모가 작아 미 육군 2사단 38보병연대 산하에 편제돼 미군의 지휘 아래 전투에 임하게 됐다. 해를 넘겨 1951년 2월 11일 네덜란드 대대는 엄청난 시련과 맞닥뜨린다. 2사단이 주둔한 횡성 일대를 총 13만5000명에 달하는 중공군과 북한군이 대대적으로 공격하고 나선 것이다. 전투 개시 후 하루가 지난 2월 12일 미군과 한국군은 수적 열세를 이유로 후퇴를 결정했고 이들이 안전하게 빠져나갈 때까지 중공군 진격을 막는 어려운 임무가 네덜란드 대대에 떨어졌다.

 

중공군은 일부 부대원을 한국군처럼 위장시켜 네덜란드 대대의 방어 진지로 보내는 비열한 술책을 썼다. 네덜란드군이 혼란스러워 하는 틈을 타 대대적 공격이 이뤄졌고 중공군으로부터 진지를 지키는 과정에서 대대장 오우덴 중령을 비롯해 네덜란드군 15명이 전사했다. 6·25전쟁사를 연구한 군사 전문가들은 “당시 네덜란드 대대가 아군 철수에 꼭 필요한 횡성교 다리를 대대장의 전사와 적중 고립의 위기 상황에도 불구하고 1951년 2월 12일 야간까지 확보해줌으로써 그나마 안전한 철수가 가능했다”고 평가한다.

 

오우덴 중령의 시신은 1951년 3월 8일 부산 유엔묘지에 안장됐다. 매튜 리지웨이 당시 유엔군사령관이 직접 장례식에 참석해 고인의 공로를 기렸다. 이후 횡성에는 네덜란드군의 6·25 참전 기념비가 세워졌고, 오우덴 중령의 고향인 네덜란드 가스텔(Gastel) 마을은 횡성군과 자매결연을 맺었다. 우리 국가보훈처는 문재인정부 출범 이듬해인 2018년 2월 오우덴 중령을 ‘이달의 전쟁영웅’으로 선정해 추모했다.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