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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보도

유엔기념공원과 관련한 신문, 잡지 등의 "언론 보도기사 모음" 입니다.

2006.10.24 부산일보/[밀물썰물] 추모명비

김일규 논설위원



한국과 미국의 공식적 첫 접촉은 140년 전에 이뤄졌다. 1866년 미국 상선(商船)제너럴 셔먼이 서해를 통해 대동강을 거슬러 오면서 였다. 그들은 평양에서 강제로 통상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자 대포와 총으로 조선 군인을 죽였다. 격분한 조선 군민(軍民)은 화공(火攻)을 퍼부었다. 결국 배는 불타고 미국 선원은 몰살당했다. 5년 뒤인 1871년 미국 아세아함대 사령관 로저스는 군함 5척을 이끌고 다시 침입,강화도를 점령했다. 그들은 조선인 350명을 보복 학살하고 한양으로 진격했으나 조선군의 저항으로 패퇴한다. 이른바 신미양요(辛未洋擾)다.

두 차례의 무력 침공에 실패한 미국은 당시 중국 정부의 실권자 이홍장(李鴻章)을 내세워 1882년 조미(조선-미국)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다. 조선이 서양국가와 체결한 첫 조약이다. 그러나 미국은 23년 뒤인 1905년 일본과 태프트-가쓰라 밀약을 맺는다. 일본이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묵인해 주는 대신,미국은 일본의 조선 식민지화를 인정하는 밀거래를 한 것이다. 이어 미국은 같은 해 포츠머스조약으로 일본의 조선 지배를 거듭 확인해 주었다. 일본의 한반도 식민지 지배는,이처럼 미국의 전폭적인 협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지난 역사에서 우리에게 몹쓸 짓을 한 미국이 우방(友邦)으로 바뀐 것은 한국전쟁 때문이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유엔(United Nations·국제연합)은 유엔헌장에 따른 집단안보권을 즉각 발동해 참전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이 주도적 역할을 했다. 미국 터키 영국 필리핀 등 17개 나라가 우리나라에 군대를 보냈고,4만895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됐다. 이들의 이름을 새긴 추모명비(銘碑)가 제61회 유엔의 날인 오늘 부산 유엔기념공원에서 제막식을 가졌다. 이 추모명비가 단순한 볼거리를 넘어 '전쟁은 인류 최고의 비극'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기념물이 되었으면 한다.
mrilgyu@busa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