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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15 국제신문/ “호주 최연소 지휘관 부친, 한국 가을 극찬한 편지 보내기도”

 

“호주 최연소 지휘관 부친, 한국 가을 극찬한 편지 보내기도”

UN공원에 잠든 용사들…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 <10> 호주군 故 찰스 그린 씨

 

- 2차대전 활약… 한국전도 참전

- 온화한 리더십으로 부대 지휘
- 텐트 날아든 포탄 파편에 전사

- “진홍색·금색으로 불타는 들판”
- 가족에게 한반도 아름다움 묘사

- “많은 시간 함께 못해 아쉽지만
- 지금 자유의 대한민국 보니
- 그 희생 헛되지 않았음 느껴”

“아버지의 희생은 한국인으로부터 존경받아왔죠. 한국인이 끊임없이 감사를 표현했기에 어머니가 남편이 없는 삶을 헤쳐 나갈 수 있었어요.”

한국전쟁으로 아버지를 잃은 안테아 그린(74) 씨는 힘든 시간을 보냈던 어머니 이야기 등 가족사를 꺼냈다. ‘조용한 지휘관’으로 불린 그의 아버지는 한국전쟁에 참전해 전사한 호주군 고 찰스 그린 중령. 그는 “아버지가 한국전쟁에서 돌아가셨을 때 나는 3살이라 기억이 전혀 없다. 다만 어머니와 주변 가족으로부터 아버지의 이야기를 전해 들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초고속 승진으로 26살에 지휘관 

 

안테아 그린 씨의 아버지인 고 찰스 그린 중령. 재한유엔기념공원관리처·안테아 그린 씨 제공

 

그의 부친은 1919년 호주 뉴사우스웨일스주 북부의 한 시골에서 태어났다. 가족들은 농사를 지어 생계를 이어갔다. 그의 아버지도 할아버지의 농장에서 쟁기질 등 일을 했다. 17살 때 지역 군에 입대한 그의 아버지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해외 복무에 자원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활약한 부친은 부하와 동료로부터 존경받게 됐고 빠른 진급을 거듭했다. 1945년 26살의 나이로 호주군 최연소 지휘관에 올랐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돌아온 아버지는 군대를 제대하고 예비군으로 지내며 나를 낳았다. 가족의 평화는 길지 않았다. 1949년 호주 정규군이 설립됐고 아버지는 다시 대대 지휘관으로 선발됐다.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왕립 오스트레일리아 연대 제3대대 지휘관으로 일본 히로시마를 거쳐 그해 9월 28일 부산에 도착했다. 북한의 평안남·북도 일대에서 한국전쟁에 참전해 전투를 치르면서 탁월하게 병사를 지휘했다.”

전쟁 중이었지만 그의 아버지는 가족에게 편지를 보내 한국의 아름다움을 설명하기도 했다. 이 편지에는 ‘진홍색 호박색 금색으로 불타는 언덕의 평화롭고 아름다운 가을’이란 표현이 담겼다. 또 ‘안개가 자욱한 산과 고요한 계곡의 아름다움’도 언급했다. 낭만적인 편지 내용과 달리 전장의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적의 포탄은 병사와 지휘관을 가리지 않았다. 1950년 10월 30일 전투를 마친 그의 그린 중령은 텐트에서 쉬고 있었다. 그때 적의 포탄 한 발이 텐트 쪽으로 날아들었다. 복부에 파편이 박힌 부친은 병원으로 이송됐으나 결국 다음 날 전사했다. “어머니는 남편을 잃은 슬픔에서 좀처럼 회복하지 못했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재혼하지 않았고 아버지를 기다렸다. 나도 어렸을 때 우리 집 정문에서 아버지를 기다리곤 했다.” 

 

 

■사랑스럽고 온화했던 남편 

 

1951년 6월 호주군이 탱크를 타고 임진강으로 진격하는 모습. 재한유엔기념공원관리처·안테아 그린 씨 제공

 

짧은 기간 한국전쟁에서 활약한 그의 아버지는 세 차례 전투의 공적을 인정 받아 미국 은성 훈장을 받았다. 이 훈장은 명예훈장 수훈십자장에 이어 세 번째로 높은 훈장이다.


“아버지는 전투에서 사용한 전략, 냉철한 머리, 활동적인 지도력, 부하와 함께 한 리더십 등으로 존경받았다.”

1972년 호주군의 한 정보장교는 그의 아버지에 관해 ‘그린 중령은 키가 크고 거무스름하며 체격이 건장한 남자로 사람들과 잘 어울린다. 압박감도 그를 괴롭히지 못했다. 그는 손재주가 좋았고 타고난 지도자의 풍채가 있었다. 한국에서 그의 지휘는 항상 확고하고 확실했다. 그는 항상 훌륭하고 명확하며 간결한 명령을 내렸다. 그는 선두 그룹의 바로 뒤에 바짝 붙어 있었다. 6주 후에 그는 대대를 전투 부대로 만들었다’고 기록하기도 했다.

그의 어머니 고 올윈 그린 씨는 1993년 발간한 책 ‘이름은 여전히 찰리(The Names Still Charlie)’에서 남편을 사랑스럽고 온화한 남자로 표현하기도 했다. 찰리는 남편의 애칭이다.

그의 어머니는 1980년 호주에 있는 남편의 추모기념관에 참석해 남편에 관한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기기로 결심했다. 13년에 걸쳐 완성한 이 책에서 그의 어머니는 ‘그는 가족을 키워준 땅을 사랑했고, 용기 있고, 헌신적이고, 낭만적이고, 그리고 조용한 방식의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군대에서 그의 경력과 그것이 주는 모든 것을 사랑했다’고 적었다. 이 책은 한국전쟁 초기 역사의 많은 부분을 당시 호주에 알렸고, 호주 언론계 등이 주목했다.

그의 아버지는 한 역사가에 의해 ‘조용한 지휘관’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2008년 영국제국전쟁박물관의 한 역사학자가 오스트레일리아전쟁기념관을 방문하면서 아버지에 관해 ‘찰스 그린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그런 사람이다. 인상적이고 역동적인 지도자였다. 훌륭한 스타일로 전투를 이끌었고 그의 죽음은 큰 손실이었다. 호주의 위대한 지휘관 중 한 명에게 조용하지만 강력한 찬사를 보낸다’고 이야기했다. 그의 아버지는 한국전쟁의 공로를 인정 받아 2019년 대한민국 을지무공훈장을 받기도 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합장

 

안테아 그린(왼쪽) 씨와 그의 어머니 고 올윈 그린 씨. 재한유엔기념공원관리처·안테아 그린 씨 제공

 

“아버지가 살아있었으면 아마 100살이 넘으셨을 것이다. 직업군인이었기 때문에 전쟁에서 살아남았다면 호주군 지도부의 일원이었을 것이다. 아니면 어머니의 책에서 언급된 대로 전쟁이 끝난 뒤 아버지 가족의 농장으로 돌아가 농부로 일했을 수도 있다. 아버지가 전사한 뒤 도착한 마지막 편지에서도 아버지가 농장을 경영하는 계획을 언급하기도 했다.”


그린 중령은 다시 호주로 돌아가지 못한 채 부산 남구 유엔기념공원에 안장됐다. 그는 어머니와 이곳을 방문해 아버지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유엔기념공원에 방문했을 때 정말 슬펐고, 겸손해졌다. 아버지의 묘지가 가꿔지고 기억되는 방식에 관해 감동하기도 했다. 이곳은 대의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사람의 영혼이 기억되는 매우 신성한 장소다.”

그는 자랑스러운 아버지의 환한 미소를 그리워했다. “아버지의 놀라운 리더십이 매우 자랑스럽다. 아버지의 희생은 한국인이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현재 모습을 만들었다. 아버지를 알기 위해 아버지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면 좋았을 텐데 아쉽다. 아버지의 미소를 볼 수 있으면 좋겠다.”

그는 2019년 11월 아버지를 따라 영면한 어머니를 아버지의 묘지 곁으로 합장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