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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업-시적울림의 세계

  • 작성자관리자
  • 작성일2007-08-27 15:11:39
  • 조회4965

유엔기념공원의 정문을 설계하신 김중업선생님의 이력을 소개할까 합니다. 김중업선생님은 1964년 유엔기념공원내 추모관과 1966년 유엔기념공원의 정문을 설계하셨습니다.
 
<추모관 정면>


<유엔기념공원 정문>
 
*김중업 작품리스트
․54년 밀바의 집 계획안
․56년 건국대학교 도서관, 필그림 홀 계획안, 명보극장, 부산대학교 본관 및 정문, 경주국립 공원 계획안
․57년 인천지방 해무청사
․58년 서강대 본관, 수도여자사범대 기숙사
․59년 중안공업연구소, 주한 프랑스 대사관, 유유산업공장
․60년 고려 인삼 공장
․62년 성신병원, 청평산장
․63년 뉴욕 세계박람회 한국관, 제주대학, 유엔묘지 채플, 설원씨 주택
․64년 행촌병원, 제주대 본관, 한창우씨 주택
․65년 서산부인과병원, 유치봉씨 주택,
66년 유엔묘지 정문, 이난영씨 세 번째 주택
․67년 윤주탁씨 주택, 이경호 저택, 미국 F.N.C.B 한국지배인저택
․68년 진해해군공관, 국제화재해상보험회사 사옥, 경생보호회관, 홍익대 본관
․69년 박치현 주택, 삼일로 빌딩, 서울역 서부역사 계획안, 송요찬 주택
․71년 니제르 도자기 공장, 유특한씨 주택
․73년 홍명조 주택
․74년 성공회 제1회관, 외환은행 본점
․79년 한국교육개발원 신관, 쇼핑센터 ‘태양의 집’, 바다호텔 계획안, 민족 대성전 계획안, 아나백화점, 방배동 민씨 주택, 한남동 이강홍 주택
․80년 부산 충혼탑
․81년 부산 문화회관 계획안
․82년 성북동 이병목 주택, 육군박물관, 경상남도 문화회관 현상설계
․83년 박씨 주택, 을지로재개발 16,17지구 현상설계 당선
․84년 군산 문화회관 현상설계 당선, 장석웅씨 주택, 예술의 전당 지명현상설계, 목포 문화방송국
․85년 국제방송센터(I.B.C)현상설계, 올림픽조형물 및 광장 현상설계 1차 당선
․86년 광주 문화방송국

※김중업 주요 연보
1922년 3월 9일 평양에서 연안 김씨 가문의 부친 김영필과 모친 이영자 사이에 5남2녀중 차남으로 태어남.
1928년 평양의 결림 소학교 입학.
1934년 평양 고등보통학교에 입학. 이때 감수성이 매우 예민하여 사와 그림에 탐닉.
1939년 평양고보시절 그림교사의 권유로 건축을 전공하기로 결심하고 요꼬하마 고등공업학교 건축학과에 입학. 여기서 파리 에꼴 데 보자르 출신의 나까무라 준빼이를 만나 그의 가르침을 받음.
1941년 12월에 요꼬하마 고공을 졸업.
1943년 김중업은 겨울에 잠시 귀국하였다가 선을 본 김병례와 혼인.
1948년 서울대학교 건축학과의 조교수가 됨.
1952년 유네스코 주최로 열린 베니스 국제 예술가 대회에 참석. 여기서 르 꼬르뷔제를 만나 파리의 그의 사무실에서 일하게 된 계기가 됨.
1953년 액-상-프로방스에서 개최된 제9차 CIAM회의에 르 꼬르뷔제와 함께 참석.
1956년 파리에서 귀국한 후 1956년 3월 5일 관훈동 198-1에서 자신의 사무소를 개설. 홍익대학교 건축학과 교수가 됨.
1962년 유엔주최로 시애틀에서 국립공원에 관한 제1차 국제회의에 참석하여 필립 존슨, I.M.페, 반 샤프트, 루이스 칸을 만나고, 파리에서 르 꼬르뷔제와 재회. 서울시에서 수여하는 문화상을 수상.
1963년 뉴욕박람회 한국관을 위해 뉴욕을 방문.
1965년 프랑스정부로부터 기사자위 받음.
1967년 홍익대학교 건축, 도시, 국토계획연구소 소장이 됨.
1971년 11월 가족을 남기고 단신으로 파리에 정착.
1973년 파리에서 100Km 떨어진 페르 앙 따르드노아에 부인과 함께 정착.
1974년 프랑스 공인건축가(DPLG)로 인정받음.
1975년 프랑스를 떠나 미국으로 건너감.
1978년 11월에 미국생활을 청산하고 한국으로 영구 귀국.
1982년 대한건축사협회 대상수상(육군박물관), 대한건축가협회 작품상 수상(한국 교육개발원 신관), 대한건축학회 작품상 수상.
1988년 5월 11일 66세를 일기로 숙환으로 사망.

시적 울림의 세계 (김중업건축론)
★『김중업-시적울림의 세계』
 
김중업은 한국 건축사에서 가장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는 건축가이다. 1952년부터 현대건축의 거장 르 꼬르뷔제 사무실에서 서양의 현대건축을 직접체험하고 한국에 귀국한 후, 그는 자신만의 독특한 건축적 경치를 개척해나갔고, 그래서 그의 작품들은 세계 건축계에 소개하여도 전혀 손색이 없을 만큼 높은 수준을 성취하였다. 1940년대 초부터 시작하여 타계할 순간까지 타오르는 담배연기와 함께 뿜어져 나온 그의 건축물들은 그의 영혼이 함축되어 있는 그 충일함의 표현이었고, 그 경건한 작품성 때문에 지금도 그 앞에 서면 심원한 시적 울림을 느낄 수 있다. 그만큼 그는 치열한 작가의식을 가지고 자신의 작품세계에 몰입했으며 그 과정에서 건축이 가지는 본원적 가치를 깊이 있게 추구하였다. 김중업 건축이 지금까지 많은 이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고있는 것은 이런 본원적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로 인해 그의 건축은 한국과 서양, 이래와 과거라는 시공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었으며, 그의 삶은 이를 너머로 마치 구름처럼 산개하였다.

어떤 때에는 폭풍우처럼 강렬한 조형의지로 대지를 휘몰아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잔잔한 솜털구름처럼 인간의 영혼에 편안함을 주기도 했다. 어떤 때는 구름사이로 펼쳐진 햇살처럼 한국건축에 밝은 전망을 드리우기도 하였고, 어떤 때는 우리시대의 어두운 그림자에 둘러싸여 해외 추방이라는 고난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에게 건축은 자연 속에 또 하나의 자연을 심는 작업이었고, 그래서 그것은 햇빛과 어둠을 삼켜 항시 변화하는 구름처럼 인간들에게 많은 이야기를 던져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건축가의 영혼이 스며들면서 그것이 인간들을 부드러운 몸짓으로 감싸줄 때 비로소 진정한 건축이 탄생한다고 믿었다. 그렇기 때문에 김중업 건축에는 시와 꿈이 담겨 있으며 영혼을 감동시키는 생동감이 있다.

건축가 김중업이 타계한지 벌서 10년이 다 되었다. 이 기간동안 한국 건축계가 그의 건축에 보여온 관심은 남다르다. 그의 건축은 계속해서 한국현대건축을 인도하는 중요한 좌표의 하나로 인식되었다. 많은 건축가들이 자신의 작품을 설명하기 위해 김중업을 끄집어 들였다. 또 많은 평론가들이 자신의 논의를 전개 시키면서, 또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납득시키기 위해서 그의 작품을 인용하였다. 그의 작품 중 몇몇은 이미 한국 현대 건축의 고전으로 받아들여졌고, 그들은 많은 후진 건축가들의 순례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건만, 아직도 그의 작품은 현재성을 잃지 않고 여전히 우리 주위를 맴돌고 있는 것이다.

김중업의 건축은 자신의 세계를 찾아 나선 긴 여정을 몇 단락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 가운데 김중업과 르 꼬르뷔제의 관계를 가장 먼저 내놓은 작품을 가지고 평가할 때, 그의 진정한 건축세계는 르 꼬르뷔제를 만난 시점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 후 그는 르 꼬르뷔제의 세계로부터 탈피하여 자신의 고유한 세계로 나아가게 된다. 1960년대는 이를 위한 다양한 조형언어의 실험이 이루어지는 시기로 여겨진다. 물론 이런 과정이 단선적이지 않다. 한국사회의 격동적인 변화, 한국 건축 계의 후진성, 건축수준의 문제, 건축가의 개인적 사정 등이 여기에 복합적으로 얽혀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크게 보자면, 르 꼬르뷔제의 건축세계를 모방하거나 변용 하면서 그의 1950년대 건축활동을 시작한 것은 틀림없다. 그리고 1961년 주한 프랑스 대사관을 지으면서, 진정으로 자신의 지향할 건축이 무엇인가를 깨닫기 시작한다. 이 작품을 계기로 그는 한국의 현실을 바탕으로 새로운 이념형을 창조했던 것이다. 하나의 이념형을 발견한 후 그는 여러 방향으로 이들을 발전시키려 하였다. 이에 따라 1960년대는 새로운 건축언어에 대한 실험으로 특징 지워진다. 그래서 조형적, 공간적, 재료적, 구축적 차원에서 1960년대 이후의 건축언어들은 그 이전의 것들과 비교하여 많은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는 1971년부터 해외로 추방되고 1978년 말에야 귀국할 수 있었다. 8년의 공백기를 가진 후 재개된 그의 건축활동은 또 다른 의미를 가진다. 이 때 나타난 건축언어들에서 르 꼬르뷔제의 영향은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대신 그 이전에 제시된 건축가 자신의 건축언어들이 더욱 풍부해지고 헤연된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렇지만 르 꼬르뷔제와의 만남을 김중업 건축의 출발이라고 상정할 경우, 몇 가지 반론이 제기될 가능성이 있다. 이 경우 그의 건축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유년시절의 요코하마 고공에서의 건축수업은 전혀 다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김중업이 르 꼬르뷔제를 처음 만난 것은 1952년 말로서, 그의 나이 30세때의 일이다. 그 이전까지 그는 상당 기간동안 건축교육을 받았고, 또 졸업 후에는 일본의 설계사무소에서 실무를 익히기도 하였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와서는 서울대학교에서 건축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교육에도 참여하였다.

즉, 르 꼬르뷔제를 만나기 이전의 형성과정은, 그를 만난 이후의 변화와 비교해 볼 때 무시할 정도로 큰 의미가 없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김중업 자신의 생각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성장과 수련시기 가운데 몇 가지는 여전히 깊이 있게 생각해 볼 주제라고 생각한다. 먼저 그의 유년시절에 관한 부분이다. 일반적으로 작가연구에게 있어서 유년시절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조형의식과 공간지각, 사물을 대하는 심리적 구조가 이때 형성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현재 이 부분에 대해서는 김중업이 자신의 작품집(건축가의 빛과 그림자, 열화당, 1984년)에 남긴 것을 제외하고는 더 이상 확보할 자료가 없는 상태이다. 그가 태어난 평양은 현재로서는 다녀올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본격적으로 김중업에 대한 르 꼬르뷔제의 영향을 기술해 보기로 하자. 사실 김중업에 대한 르 꼬르뷔제의 영향은 너무나 총체적이고 전인격적이어서 각 부분으로 떼어 내어 서술하기가 너무나 어렵다. 건축을 제외하고도, 그의 인생관과 세계전망에서부터 생활방식과 아뜰리에의 운영과 같은 세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르 꼬르뷔제의 영향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먼저 세계를 내다보면서 자기자신을 구성하는 방식에 있어서, ‘르 꼬르뷔제는 공인된 집단의 공격에 대항하면서, 정신적 계시를 통한 이상을 끈질기게 품고 살았던 탄압 받는 소수와 자신을 동일시하였다.’ 이런 자기 동일시는 종교적 탄압을 피해 쥐라지방으로 이주한 르 꼬르뷔제의 가문의 전설과 연관된 것이다. 그래서 그는 계속해서 에꼴 데 보자르를 포함한 모든 기존의 건축기관과 제도들을 분신하였고, 그가 출판한 책들과 도시계획안들에서 바로 이런 그의 신념은 구체적으로 표출되었다. 김중업에게도 이런 태도는 그대로 발견된다. 그는 자신의 건축을 고구려 건축과 연관지으려 했고, 또 자주 고구려의 힘찬 선을 재현해 보고 싶다고 이야기하였다. 그것은 평양이라는 그의 출신과 분명 연관이 되는 것이다. 또한 그는 한국 건축계에서 계속 탄압 받는 소수로 남기를 고집했다. 군사정권과 밀착되어 정부로부터 많은 국가 프로젝트를 수주 받았던 김수근과 대조적으로, 그는 1960년대 이후 역사의식을 가지고 군사정권을 향해 비판의 목소리를 거침없이 쏟아 내었다. 그 결과 1971년부터 8년간에 이르는 해외추방을 당하게 되지만, 그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또한 김중업은 르 꼬르뷔제에게서 자신과 유사한 처지를 발견했다. 사실 르 꼬르뷔제는 파리에서 뿌리 없는 이방인의 존재였다. 그는 당시 프랑스의 건축을 좌지우지했던 에꼴 데 보자르 출신이 아니었고, 그가 프랑스 국적을 취득한 것은 1930년이었다. 이 때까지 그는 스위스 국적을 가지고 있었고, 따라서 건축수주를 위해 공식적으로 기댈 곳이 별로 없었다. 그는 오직 자신의 재능과 세계전망을 가지고 자신의 영역을 개척했던 것이다. 이 점은 김중업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한국전쟁으로 남한과 북한이 갈리면서 모든 재상과 인간관계들을 평양에 두고 월남한 아웃사이더였다. 물론 그가 일본에서 대학을 나왔기 때문에 어느 정도 인맥을 기대할 수 있었으나, 그가 다닌 요코하마 공대는 한국인들에게 별로 알려진 학교가 아니었고, 또 함께 건축을 공부한 친구도 별로 없었다. 그래서 김중업은 한국에서 작품활동을 하면서 여러 가지 불미스러운 일들을 당하지만 이런 사회상황에 별로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재능을 확신하며 자신의 소신과 원칙을 지켰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 과정에서 그는 많은 좌절을 겪어야만 했고, 또한 많은 적들을 주위에 만들어 냈던 것이다.

김중업이 르 꼬르뷔제에게서 받은 영향을 다른 건축가들과 비교해서 살펴보면 매우 재미있는 사실이 발견된다. 같은 대상을 모방하더라도 각기 다른 방식으로 변용 되기 때문이다. 사실 르 꼬르뷔제는 김중업뿐 아니라 다른 많은 세계의 건축가들로 하여금 자신의 건축을 모방하도록 유혹하였다. 그리고 그 유혹은 너무나 강렬하여 후에 태어난 많은 건축가들의 생각을 편향시켰고, 그들이 그의 건축의 자양분을 한 부분씩 떼어 내어 그것을 나눠 가지도록 하였다. 그렇지만 그의 영향은 건축가들이 처한 시대적, 지역적 상황과 개성에 따라 다르게 나타났기 때문에 그의 건축은 다양한 방식으로 변용 되고 모방되었다. 따라서 이들을 비교해 본다면 김중업이 르 꼬르뷔제 건축에서 특히 주목했던 것들과 한국에서 어떤 점이 특별하게 의미를 가졌는지를 명확하게 그려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이제 모방과 변용으로 표현되는 김중업의 초기 건축활동에 대해 살펴보겠다.

김중업건축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1956년 귀국하여 1971년 다시 해외로 망명할 때까지 15년의 기간동안 대부분 이루어졌다. 주요작품들이 이때 설계되었고, 많은 건축언어들이 새롭게 창조된 것도 이 때이다. 이 시기는 건축언어들이 새롭게 창조되었다. 이 시기는 여러가지 사항들을 고려해 볼 때 크게 두가지로 분리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르 꼬르뷔제 건축을 모방하고 변용하여 자신의 생각을 건축화 하려는 시기이고, 또 하나는 김중업 자신의 표상시스템을 구축해 나가는 시기라고도 볼 수 있다. 그것은 김중업이 귀국하여 주한 프랑스대사관을 짓기까지, 즉 1961년까지의 시기로 여겨진다. 주한 프랑스대사관을 중요한 기준점으로 삼은 이유는, 이 작품 이후에 나타나는 김중업의 작품경향이 그 전의 것과는 판이하게 달라졌기 때문이다. 김중업 자신이 밝혔듯이 프랑스 대사관은 자신의 건축에 있어서 한 획을 그은 작품이고, 그가 프랑스에서부터 가꾸어 왔던 건축의지를 일정부분 완성한 작품이라고 보여진다. 르 꼬르뷔제의 영향에서 어느정도 벗어나서 독자적인 작품세계의 가능성을 최초로 열어 놓은 작품이다. 또 한국건축의 전통문제에 대해 나름대로의 해결책을 제시한 작품이다. 따라서 그 이전의 작품들이 자신의 작품세계에 도달하기 위해 르 꼬르뷔제의 작품 혹은 한국의 전통건축을 모방, 변형한 것이라면, 이것 이후의 작품은 이전과는 다른 조현언어를 탐구하는 시기로 보아야할 것이다. 르꼬르뷔제의 영향을 벗어나서 보다 자신의 머리속에 담긴 고유한 세계를 찾아나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1961년 이후의 작품들은 그 경향의 편차가 심하다. 삼일로 빌딩과 같은 건물이 있는가 하면, 제주대학이나 서산부인과 병원과 같은 건물도 있다. 이런 시기의 구분은 김중업의 생각과는 어느정도 일치한 듯 하다.

김중업은 프랑스에서 귀국하면서 근대건축이 지향한 기본이념들을 한국에 도입하려는 의도를 분명히 가지고 있었다. 물론 이런생각은 1960년대 이후에는 많은 부분수정되지만, 작품활동의 초기에는 이런의지가 그의 작품속에 강하게 반영되었다.
김중업의 초기 작품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두가지 정도로 생각해 볼수 있는데, 하나는 건물에 투명성과 경량감을 부여하는 시도이고, 또 따른 하나는 건물의 구축세계를 노출시켜 이거을 조형과 결부시키려는 시도이다. 이런 두가지 시도에서 김중업이 파악한 근대 건축의 핵심이 무엇인지가 명확히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건물의 구조체계를 노출시켜 조형적인 효과를 거두려는 시도도 김중업의 초기작품에서 주된 모티브로 등장하였다. 초기에 설계한 건물 가운데 이런 경향을 따는 대표적인 것이 안양에 지은 유유산업 건물과 인천 해무청, 수도여사대(현 세종대학교) 체육관이다. 그리고 1960년대 중반에 설계한 건물로는 유엔묘지 채플과 도쿄 호텔 등이 있다. 그리고 이들 건물처럼 구조체계가 명확하게 노출하지 않지만, 박스형으로 지어진 대부분의 건물에서 구조체계와 그 속에 채워진 벽은 재료에 의해 시각적으로 분리되었다. 이런 방식을 사용하면서 김중업은 “건축가의 가장 중요한 임무가 건축구조를 예술적 형태로 전달하는 것”이라는 뵈티셔의 주장을 상기했을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투명성의 확보와 구조체계의 노출은 근대건축의 도입과 관련하여 그의 초기작품은 특징짓는 하나의 중요한 축이었다. 그렇지만 그의 초기작품에는 이런 개념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또 다른 특징이 존재한다. 그것은 전통건축의 현대화에 관한 것이었다. 이것은 당시 국가로부터 의뢰된 프로젝트를 설계하면서 지역적 아이덴터티를 직설적으로 표현하도록 요구받았기 때문에 일어났다. 1956년부터 시작된 경주국립공원 계획안, 1957년에 의뢰된 워싱톤 자유의 종각 계획안, 1962년에 시작된 석굴암 전실 계획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제 김중업의 후기 작품세계를 들여다본다면, 후기 초 즉1970년대는 약간의 시련을 겪었다. 1971년 11월 3개월 여권으로 프랑스로 추방당했다. 형식은 자진 출국이었으나 거의 반강제적인 것이다. 거기서 생활하며 우편으로 한국의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건축활동을 계속하였다. 그러다가 1975년 프랑스에서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니제르에 도자기 센터를 비롯해 몇 가지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몇몇 학교에서 학생들을 지도하며 보냈다. 그러다가 1978년 11월 김중업은 오랜 외국생활을 청산하고 한국에 귀국하였다. 니제르에 도자기 공장을 지으면서 이미 그에게는 정식으로 여권이 발급되었고, 미국에 체류할 당시 한국정부와도 어느 정도 관계가 회복된 상태였다. 또 김중업은 미국에 체류하면서 이미 미국영주권을 획득했기 때문에 귀국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그가 외국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하게 된 가장 큰 동기는 건축설계를 하고픈 욕망 때문이었다. 물론 미국에서도 몇 가지 프로젝트를 진행시켰지만 대부분 계획안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리고 더 이상 미국에서 활동을 지탱할 수 없을 만큼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그는 지쳐있었다. 너무 늙은 나이에 미국으로 건너갔기 때문에 거기서 새로운 사업을 펼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귀국 후 그는 그 동안 축적하였던 모든 역량을 발휘하여 왕성한 활동을 펼치게 된다. 이 때부터 1983년까지 5~6년의 기간 동안 그가 설계한 작품들은 매우 높은 건축적 수준을 획득하였고, 1960년대에 비견될 만큼 새로운 건축언어를 풍부하게 쏟아 놓았다. 그들은 깊은 사색과 풍부한 경험을 통해 얻은 것인 만큼 다양성과 세련미를 획득하고 있다.

그렇다면 1980년대에 들어와 김중업 건축에서 나타나는 건축적 특징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떠나가기 전까지 그의 건축세계에서 계속 나타났던 르 꼬르뷔제의 영향이 거의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각 건물 프로그램에 따라 김중업 특유의 건축언어들이 속속 등장하게 되었고, 이들은 주로 1960년대부터 탐구되었다가 70년대 김중업이 외국에 머물면서 더욱 깊이 있게 숙성된 것이다. 오랫동안 몰두해서 얻은 것이기 때문에 이들은 고도의 정신적인 가치들을 지니고 있었고, 조형적으로도 아름다움을 잃지 않았다. 주택작품에서 그 변화는 두드러졌다. 직각의 그리드와 사각형 매스들의 상호 관입하는 형태가 주거에서는 여러 개의 불규칙한 곡선과 단위요소들이 병치된 건물들이 등장하였다. 이들은 주거의 가장 원초적인 면을 건드리고 있다. 사무실 시설에서도 1960년대는 철근 콘크리트의 박스형 건물이 주류를 이루었던 반면, 1980년대는 날카로운 예각으로 된 유리 매스들이 건물의 부여하였다. 기념비 건축의 경우 1960년대에 2개의 주요 기념비를 건축하였다. 이들은 그가 평소에 생각했던 문과 탑의 이미지가 현대적으로 반응된 것이다. 이들 기념비 건축을 통해 그 동안 논란이 되었던 전통문제를 현대적 의미로 해결하려는 노력이 돋보인다.

이런 새로운 건축언어의 창조와는 달리 기존의 건축언어를 자기복제하는 현상도 일어났다. 기존에 탐구하였던 평면 유형이나 조형언어를 건물 프로그램과 규모에 맞게 변형하여 새로운 계획안으로 내놓은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과정에서 스케일이 무리하게 확대되었고, 이것은 조형상에 많은 문제점을 노출시켰다. 특히 김중업이 비례와 스케일의 차이를 점차 혼동하면서 점차 혼동하면서 점차 작품의 질이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1980년대 김중업의 작품에서 주목할만한 것은 루이스 칸으로부터 받은 영향이다. 김중업은 이미 그가 생존할 당시 만난 적이 있었다. 1962년 시애틀에서 열린 세계국립공원회의에 한국대표로 참여하였고, 여기에서 돌아오는 길에 아세아재단의 후원으로 미국의 건축가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 이 중에 루이스 칸도 포함되었다. 그렇지만 1960년대 그의 건축은 주로 르 꼬르뷔제적인 언어가 지배하였고, 칸의 영향은 거의 없었다. 그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진행된 것은 미국에 체류할 때이며, 이 때 김중업은 그의 작품을 진지하게 살펴보았다고 한다. 이런 노력들이 1980대 그의 작품 속에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루이스 칸으로부터 받은 영향이 그의 건축에 내재되어 있는 본질적인 면을 건드리지는 않고, 오히려 형태적인 측면만을 드러내고 있어서 아쉽다. 김중업의 1980년대 작품에서 칸의 영향이 가장 두드러진 건물은 태양의 집 쇼핑센터이다. 여기서 김중업은 칸의 대표적인 조형언어가 나타난다. 즉 2~3개의 층이 하나의 커다란 원형창이 입면에 주요 모티브로 나타나고, 이것의 중간에는 원형창을 가로지르는 보가 걸려서 독특한 느낌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이제 김중업 건축이 가지는 역사적, 건축적 의미를 조심스럽게 평가하면서 결론을 맺고자 한다. 물론 이런 평가가 여러 가지 한계 때문에 부정확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시간적으로 볼 때 김중업이 죽은지 10년밖에 지나지 않아서 그의 건축을 역사적으로 평가하기에는 이르다고 생각한다. 좀 더 시간이 흐른 후에야 그의 건축에 대한 진정한 평가가 내려질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는 지금까지 여러 잡지나 책, 혹은 논문을 통해 건축학자들이나 평론가들이 내린 평가를 정리하면, 그들에게서 발견되는 몇 가지 오류들을 교정하고 또 새로운 자료에 의해 밝혀진 김중업 건축의 또 다른 측면을 덧붙이고자 한다. 지금까지 김중업 건축에 대한 평가는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다. 먼저 그의 건축을 평가한 초기의 글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서구의 모더니즘을 한국건축으로 승화시킨 최초의 건축가라는 평가에 동의하였다.

김중업이 한국에서 중요한 건축가로 자리매김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소화하여 뛰어난 작품을 획득하였기 때문이다. 이런 평가는 김중업이 처한 시대상황과 연관되어 가장 설득력 있는 자리 매김으로 인정되어 왔다.
두 번째 평가는 그의 작업을 비판적으로 보는 사람들에 의해 주로 이루어진 것으로, 김중업을 과도한 형태주의자로 평가하는 경향이다. 이런 평가는 그의 작품에서 도도히 흐르고 있는 낭만성 때문에 주로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김중업은 자신의 건축에서 성취해야할 좌표로 가우디의 사그라다 파미리아와 르 꼬르뷔제의 롱샹성당을 꼽고서, 거기에는 ‘꿈과 시가 흠뻑 담겨져 눈으로 듣는 음악을 낭랑히 울려주고 있으며, 그 조각적 건축이 우주를 삼킬 듯 웅장하고 감동적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등장하는 꿈, 시, 음악, 웅장, 감동이라는 말은 그가 건축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표출하고자한 진정한 건축주제였음이 틀림없다. 이런 그의 생각이 건축물로 구체화될 경우, 그것은 과도한 형태주의적 경향은 1980년대 이후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 때 그의 건강이 악화되면서 더 이상 새로운 건축언어의 창조가 중단되는 대신 과거 자신이 만들었던 건축언어를 자기복제하는 현상이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기존의 형태가 지나치게 스케일이 과장되기도 하고, 또 기존의 건축언어들이 별다른 연관성 없이 합성되기도 하여 전체적으로 작품의 질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낳았다.

이제 건축가는 떠나가고 그가 남긴 건축물과 시중에 떠도는 신화만이 우리 가운데 남아 있다. 그것은 건축가 자신이 건축을 통해 구축한 세계였다. 그에게 건축은 인간에의 찬가였고, 알뜰한 자연 속에 인간의 보다 나은 삶에 바쳐진 또 하나의 자연이었다. 그래서 그는 건축에 대해서 다름과 같이 노래하였다. “건축이란 그리 흔한 존재가 아닙니다. 헤아릴 수도 없이 구축한 무질서 속에서도 고고히 자신을 지키고 있는 귀한 존재만을 건축이라고 부릅니다. 그러기에 건축이란 만의 하나 정도의 확률밖에 없고 이를 갈아 맞추는 건축가란 공간 속에 자신을 송두리 채 불사르는 이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