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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08 국제신문/ “한국전 두 형 참전…북녘땅 잠든 둘째 형 유해도 수습 못 해”

“한국전 두 형 참전…북녘땅 잠든 둘째 형 유해도 수습 못 해”

UN공원에 잠든 용사들…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 2 <1> 뉴질랜드 故 로버트 마르치오니

 

 

 

▷ 인터뷰 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F71Z3jxmQf4 

 

 

- 19세 나이로 작전수행 중 숨져

- 뉴질랜드 해군 중 유일 전사자
- 시신 北 해변에 돌·모래로 안장
- 유엔공원서 가묘로 기리고 있어

- 90세 동생 “사무치게 그리운 형
- 70년 머문 한국이 이젠 그의 집”

“18살인가 19살쯤 아버지께 ‘나도 한국(전쟁)에 가고 싶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 2명이 한국에 갔는데 1명은 이제 돌아왔고, 1명은 아직 한국에 있으니 ‘넌 갈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래도 ‘성인이 되면 말릴 수 없다’고 이야기하셨죠.”

 

둘째 형 로버트 마르치오니(왼쪽)가 뉴질랜드 해군 복무시절 전우들과 식사를 하는 모습. 토니 마르치오니 제공

 


 

뉴질랜드 북섬 해밀턴에 거주하는 토니 마르치오니는 90세 고령에도 70여 년 전 일을 또박또박 기억해 냈다. 당시 큰 형인 존 마르치오니는 1950년 8월 뉴질랜드 해군으로 6·25전쟁에 참전했고, 벌써 고향으로 귀환한 뒤였다. 첫째 형 참전 뒤 3개월이 흘러 6·25전쟁에 투입된 둘째 형 로버트 마르치오니(애칭 밥)는 뉴질랜드 해군으로 작전 수행 중이었다.


“나는 그때 우체국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안에서 하는 작업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둘째 형 밥이 전쟁 중 보낸 편지에서도 내가 (함정 생활을 해야 하는) 해군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고 이야기하곤 했었죠. 그래서 나는 공군으로 입대해 훈련받을 생각이었습니다. 실제로 3개월 훈련을 받았습니다.”

꿈과 호기심 많던 토니에게 전쟁이 비극으로 바뀌는 덴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북한에 영원히 잠들다 

 

큰 형 존 마르치오니(왼쪽부터)와 그의 모친, 로버트 마르치오니가 함께 찍은 사진. 토니 마르치오니 제공



1951년 8월 26일 새벽 북한 평양에서 남서쪽으로 110㎞ 정도 떨어진 소곤리라는 서해의 작은 마을 해안. 토니의 둘째 형 밥은 5명의 전우와 뉴질랜드 함정 로토이티(ROTOITI)호를 떠나 이곳에 은밀히 상륙했다. 당시 밥은 19세에 불과해 작전 투입이 허락되지 않았지만, 전우와 함께하고 싶었다.


밥의 간절한 바람은 통했다. 적군 지역에 도착한 밥 일행은 20m가 넘는 해안 절벽을 기어올라 적의 동태를 살피는 등 정찰 작전을 진행 중이었다. 혹시나 적군을 사살하거나 생포하면 일거양득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밥 일행은 적군의 위치를 확인했다. 밥이 수류탄을 던지려고 일어섰다. ‘탕탕탕’ 순식간에 적군이 대응 사격을 했다. 밥은 가슴에 깊은 총상을 입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전사했다.

밥의 전우들은 밥의 시신을 수습해 이곳을 벗어나려 했다. 우선 해안절벽에서 밥의 시신을 해안가로 굴려 떨어트렸다. 함정까지 돌아가는 길에 적군의 추격이 이어졌다. 시간이 촉박했던 밥의 전우들은 밥의 시신에 임시로 돌과 모래를 쌓아 안장했다. 다음 날이나 다른 기회를 봐 데리고 올 계획이었다.

그러나 다음 날부터 적군의 경계가 강화되는 등 이곳에 다시 접근하기가 어려워졌다. 결국 로토이티호 전우들은 다음 날 갑판 위에서 밥의 장례를 치러야 했다. 당시 전황은 1950년 11월 중공군의 참전 이후 국군과 유엔군이 후퇴해 38선 인근에서 교착 상태였다.

“둘째 형과 함께 작전에 투입됐던 참전용사 노먼 스콜스라는 분이 형의 마지막을 자세히 이야기해 줬습니다. 이분이 형을 응급 치료했고, 곧장 적을 향해 달려가 수류탄을 던져 적군 4명을 처리했습니다. 형을 끝까지 데려오려고 했던 공로를 인정받아 훈장을 받았습니다.”

밥은 6·25전쟁에 참전한 뉴질랜드 해군 중 유일한 전사자로 기록됐다. 뉴질랜드 해군은 1984년 12월 오클랜드 데번포트 해군기지에 그의 업적을 기리고 추모하는 패를 내걸었다.

“나에게 가끔 뉴질랜드는 아름다운 나라인데 왜 전쟁터로 갔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근데 뉴질랜드에서 전쟁이 터지면 한국 사람도 우리를 도울 것이라 믿습니다. 그게 사람의 본성이고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한국도 통일되길 바랍니다. 뉴질랜드도 북섬과 남섬으로 나뉘어 있는데 다른 쪽에 있는 친구나 가족을 못 보면 슬플 것 같습니다.”

 

 

■ 편지로 못다 한 이야기


로버트 마르치오니가 6·25전쟁 기간 뉴질랜드 집으로 보낸 편지 뭉치. 

아래 사진은 그가 1951년 8월 16일 쓴 마지막 편지.


 

밥에 관한 이야기 도중 토니는 1951년 8월 16일 밥이 쓴 마지막 편지를 낭독했다. “마지막 편지에는 ‘아마 이번이 마지막 여정이 될 것 같다’는 이야기를 썼습니다. 또 그가 쓴 편지에는 포옹과 키스를 의미하는 ‘XOXO’가 장난스럽게 많이 적혀있기도 했었죠. 시기별로 정리해 보니 밥이 보낸 편지가 100통 정도 있더군요. 형은 항상 편지의 첫머리에 가족을 아끼고 사랑한다는 표현을 썼습니다.”


밥의 약혼녀와 첫째 형 존의 일화가 얽힌 편지도 소개했다. 존은 뉴질랜드로 먼저 돌아온 뒤 가끔 밥의 약혼녀를 동네 축제나 파티 등에 데려다주곤 했다. 밥이 챙겨주지 못하니 존이 대신 챙겼다. 이 사실을 안 밥은 편지에서 농담 투로 존을 놀리기도 했다.

“밥은 존에게 ‘자기 약혼녀를 데리고 다니지 말라’고 편지에 썼죠. ‘나중에 눈에 멍이 들 수 있다’고 농담하기도 했습니다. 아마 밥이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왔으면 약혼녀와 결혼해 잘 살았을 것입니다. 밥이 ‘첫눈에, 사랑에 빠졌다’고 이야기 해주기도 했죠. 밥의 성격상 도시나 사무실에서 일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뉴질랜드 어느 농장에서 말을 타는 등의 삶이 더 어울렸을 것 같습니다.”

 

■ 이제는 찾을 수 없는 형


토니 마르치오니가 국제신문 취재진과 인터뷰하는 모습. 김태훈 PD


밥을 사무치게 그리워했던 토니는 2005년과 2018년 두 차례 한국을 찾았다. 판문점 돌아오지 않는 다리에 선 그는 다리의 중간까지밖에 갈 수 없었다. 토니는 그곳에 양귀비(퍼피)를 두고 먼발치에서 북한을 바라보며 형을 추모했다. “눈으로 봤을 땐 작은 경계석 같은 것처럼 보였는데 그것 때문에 형이 있는 곳으로 못 간다는 게 이상하게 느껴졌습니다.”


밥의 가묘가 마련된 부산 남구 유엔기념공원도 방문했다. “시간이 오래 걸리긴 했지만, 유엔기념공원에 밥을 기억하는 가묘가 생겼고 이 소식에 기뻤습니다. 유엔기념공원이 잘 정돈돼 있어 이곳에 들어갔을 때 6·25전쟁이 잊힌 전쟁이란 생각이 들지 않았어요”

밥이 한반도에 잠든 뒤 토니 가족의 또 다른 사명은 ‘밥을 찾아야 한다’였다. 토니의 아버지와 첫째 형 존이 이 일을 주로 도맡았다. 이제 부모와 다른 남매 모두 고인이 돼 이 일을 토니가 맡고 있다.

“첫째 형 존이 살아있을 때 이야기한 건데 밥을 못 찾을 것 같다고 이야기했었습니다. 혹시나 찾으면 유엔기념공원에 모시는 걸로 하자고 이야기했죠. 밥은 뉴질랜드보다 한국에서 70년 넘게 있었습니다. 이제 한국이 그의 집입니다. 그를 찾으면 유엔기념공원으로 가는 게 맞죠. 유엔기념공원이라면 잘 돌봐줄 것입니다.”


■형과의 추억, 그리고 그리움




토니가 밥을 간절히 찾는 덴 남다른 추억이 많은 탓이다. 그들의 고향은 뉴질랜드 북섬 내륙에 있는 타이하페(Taihape). 마을 주민이 3000여 명밖에 안 되는 작은 마을이다. 스포츠를 좋아했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두 형과 럭비나 복싱을 즐겼던 추억이 가득한 곳이기도 하다.

“밥이 해군 일을 끝내고 집에 오면 나랑 스파링하곤 했습니다. 우리 집 정원에서 둘이 글로브를 끼고 스파링을 즐겼죠. 한번은 밥이 나를 너무 세게 때려서 ‘나는 진짜 못하겠다’고 장난으로 글로브를 벗어 던지기도 했습니다.”

밥과 관련한 다른 추억도 회상했다. “한번은 타이하페에서 열린 한 지역 축제에서 행사 사회자에게 ‘밥이 노래를 할 거다’고 이야기해 행사 사회자가 밥을 찾기도 했었죠.” 당시를 떠올리며 밝게 웃던 토니는 “밥이 아일랜드 노래를 잘하고 즐겨 불렀습니다”고 말했다.

70여 년이 지났지만, 토니는 밥과의 추억을 어제 일처럼 이야기했다. 그는 형을 향해 울먹이며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형, 엄청 보고 싶습니다. 여기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남매 중 마지막 남은 사람이 나라서 더 생각하게 됩니다. 지금은 북한의 해안가에서 쉬고 있을 수 있지만 나는 절대 안 잊을 겁니다. 아직도 지역신문에 형이 전사한 날 부고 기사를 내고 있어요. 다른 사람들도 형을 잊지 않길 바랍니다. 형이 편히 쉬길 바랍니다.”

 

영상=김태훈 PD


※제작지원 : BNK금융그룹

※취재협조 : 재한유엔기념공원관리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