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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11 국제신문/ “父 결혼 8일 만에 또 한국행…부산 전우 곁에 묻어달라 유언”

 

“父 결혼 8일 만에 또 한국행…부산 전우 곁에 묻어달라 유언”

UN공원에 잠든 용사들…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 2 <11> 네덜란드군 故 율리우스 엥버링크





- 8살 때부터 겪은 세계대전 영향
- 자연스럽게 군인의 길로 들어서
- 한국전 참전 보병부대 1년 근무
- 전우 그리워 휴전 뒤 2번째 파병

- 가족에 한국 생활 얘기 않던 그
- 치매 앓으면서 하나둘씩 털어놔
- 슬픈 감정 억누른 PTSD 증세도
- “父 계신 유엔공원 잘 보존되길”

“아버지는 두 차례나 한국에 갔다가 돌아왔지만, 그 기억을 쉽게 꺼내지 않았습니다. 치매에 걸리고 나서야 조금씩 이야기해 주셨어요. 안타깝지만 훨씬 이전부터 앓고 있던 PTSD(외상후스트레스장애)도 그때 발견됐습니다. 그래도 아버지가 영원히 잠들고 싶은 곳은 전우가 묻힌 한국이었습니다.”

네덜란드 중부 지역인 위트레흐트의 페이넨달에서 만난 버나르트 엥버링크(59)가 아버지의 한국전쟁 참전 이야기를 꺼냈다. 그의 아버지는 네덜란드 반 호이츠 부대 소속으로 한국전쟁에 나섰던 율리우스 엥버링크다.

율리우스 엥버링크(왼쪽)가 군복을 입고 동료와 사진을 찍고 있다. 버나르트 엥버링크 제공


■ 두 번의 한국행

율리우스는 1931년 태어나 네덜란드 동부 지역인 헬데를란트의 아펠도른에서 자랐다. 1939년 제2차세계대전이 벌어졌고, 독일과 인접한 아펠도른이 독일군에 점령됐다. 어린 나이부터 전쟁의 고난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8살부터 전쟁을 겪었습니다. 전쟁이 끝났을 땐 14살쯤 됐었죠. 아버지는 독일군이 점령했던 지역에 살면서 어린 나이에도 전쟁에 관해 잘 알고 있는 편이었습니다.”

전후 율리우스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했다. 어린 시절 내내 전쟁의 영향을 받은 탓인지 자연스레 군인의 길을 택했다. 처음에는 네덜란드가 지배하고 있던 인도네시아에 가고 싶었다. 그러나 어린 나이가 발목을 잡았다. 이후 선택한 곳이 한국이었다.

“아버지가 모험적인 성격 때문에 한국전쟁에 참전한 것 같아요. 물론 아버지에게 한국은 미지의 세계였습니다.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을 겪을지 전혀 예상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죠.”

1952년 2월 한국으로 떠난 율리우스는 한 달 만에 부산에 도착했다. 그가 배치받은 곳은 보병부대였고, 박격포를 쏘는 임무를 맡았다. 주둔지 인근 경계 지역에서 정찰 업무도 수행했다. “사실 아버지가 가족에게 한국에서 보냈던 시간을 전혀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전쟁에서 한 일은 뒤늦게 들어 이 정도만 알고 있어요.”

한국에서 1년이란 시간을 보낸 율리우스는 1953년 5월 네덜란드로 무사히 귀국했다. 이 시기에 평생의 반려자인 아내를 만나 결혼했다. 그러나 그는 돌연 한국행을 택했다. 1953년 12월 율리우스는 결혼한 지 8일 만에 다시 한국으로 떠났다.

“첫 참전 후 네덜란드로 돌아온 아버지는 무엇을 해야 할지 정하지 못했습니다. 전장에 두고 온 전우 생각도 났죠. 그때는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했고, 전쟁을 끝내고 싶어 했습니다. 당시 아버지는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한국행 배를 탔는데, 결혼사진도 제대로 챙기지 못했어요. 외할머니가 급하게 결혼사진을 챙겨 아버지가 탄 배에 오른 전우를 통해 전달하기도 했습니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으로 한국전쟁이 사실상 끝나면서 적의 위협은 크지 않았다. 율리우스는 전후 혹시나 모를 사태에 대비한 병력으로 한국에 주둔했다. 그렇게 1년을 한국에서 복무하고 1954년 12월 네덜란드로 무사히 귀환했다.


■ 전쟁이 남긴 아픔


율리우스 엥버링크(왼쪽)와 아내의 증명사진. 버나르트 엥버링크 제공

한국전쟁 후 율리우스는 계속 군대에 남았다. 네덜란드 군대 부사관 계급 중 가장 높은 ‘아주단트(adjudant)’까지 진급했고, 55세의 나이에 전역했다. 그사이 버나르트를 낳는 등 네덜란드의 삶에 익숙해졌다. “제가 태어난 게 1963년 독일이었어요. 아버지가 독일에 주둔할 당시 저를 낳았죠. 저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일하는 군부대에 자주 갔고 그곳에서 자랐습니다.”

군 생활에서 전역한 율리우스는 세계 여행에 빠졌다. 한국전을 가겠다고 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모험적인 성격 때문이었다. 율리우스는 포르투갈 스페인 이탈리아 등을 여행했다. 아프리카 대륙 최남단에 있는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이주해 10년 정도 살았다.

“아버지가 저에게 윈드서핑을 가르쳐 줬을 때가 기억 나요. 저와 아버지는 이탈리아 바닷가에서 윈드서핑을 하면서 많은 시간을 보냈죠. 아버지가 시가를 물고 윈드서핑 했던 게 선명합니다. 그때 아버지는 시가가 바닷물에 젖지 않도록 노력했는데, 그 모습이 정말 재밌었어요. 한 번은 아버지가 보드에서 떨어졌는데, 숨을 못 쉬겠다고 하자 제가 건져 올려준 것도 기억 나요.”

항상 정정할 것 같았던 율리우스는 노화를 겪으면서 치매를 앓기 시작했다. 이전까지 한국전과 관련해 가족 누구에게도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런데 치매에 걸린 뒤 하나둘 관련된 이야기를 꺼냈다. 그때 PTSD도 발견됐다.

“치매에 걸리기 이전부터 PTSD가 왔지만, 숨기고 사셨던 것 같습니다. 저의 가족은 원래 다섯 남매인데, 누나 중 한 명은 사산아였고 여동생은 일주일 만에 눈을 감았습니다. 이런 상황이 벌어져도 아버지는 슬픈 감정을 보이는 대신 ‘삶은 원래 그런 것이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태도를 보이셨어요. 지금 돌이켜보면 이럴 때 유독 감정을 배제했던 게 아버지의 PTSD 증세였던 것 같아요.”

 

지난해 11월 부산 남구 유엔기념공원에서 군복을 입은 버나르트 엥버링크가

아버지 율리우스 엥버링크의 안장식 중 무릎을 구부려 헌화하고 있다. 재한유엔기념공원관리처 제공

 

 

■죽어서도 묻힌 한국


2020년 8월 31일 율리우스는 89세의 나이에 눈을 감았다. 2년 정도 시간이 흘러 지난해 11월 11일 그는 한국전을 함께 치렀던 전우가 묻힌 부산 남구 유엔기념공원에 안장됐다. 두 번이나 한국을 찾았던 율리우스는 자신이 마지막으로 묻힐 장소로 한국을 선택했다.

“제가 아버지를 네덜란드에 안장하지 않고 한국을 택한 이유는 두 가지에요. 우선 아버지가 한국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을 누나에게 하셨어요. 또 아버지의 인생에서 가장 큰 부분은 한국에서 보낸 시간과 경험이라 생각합니다. 이런 점에서 유엔기념공원에 아버지를 안장하는 게 그를 기리는 방법이라 생각했습니다.”

유엔기념공원이 잘 정돈돼 관리되는 모습도 버나르트의 마음에 들었다. “이곳을 잘 보존해야 합니다. 그래야 나중에 안장자 유족이 와서도 가족을 기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유엔기념공원은 잠든 누군가의 기억을 살려줄 중요한 장소라고 생각합니다.”

아버지 이야기의 말미에 버나르트는 아버지를 향한 여전한 사랑과 그리운 마음을 나타냈다. “무엇보다 아버지를 사랑합니다. 그리고 그립습니다. 보고 싶어요. 아버지는 제가 바라던 최고의 아버지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