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30 국제신문/ “직업군인 거부해 부산행…한국전 참혹함 책으로 펴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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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2023-10-30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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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링크 https://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0300&key=20231030.22013008256
“직업군인 거부해 부산행…한국전 참혹함 책으로 펴냈죠”
UN공원에 잠든 용사들…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 2 <17> 영국군 케네스 켈드
▷ 영상: https://youtu.be/-aKxfzHuD9U?si=n3t5MIhH3D0v8aCo
- 상관 요구 거부로 참전 명 받아
- 부산 도착하니 춥고 끔찍한 악취- 연천군 일대서 소총수 임무수행
- 생존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전우애
- 휴전 뒤 떠나기 전 유엔공원 찾아
- 전사 대원에 가슴 아픈 작별인사
- 英서 참전용사협회 활발히 활동
- ‘후크고지의 영웅들’ 등 3권 발간
“전쟁에서 전우를 잃는 게 가장 힘들었습니다. 이걸 잊고 앞으로 나아가야만 살 수 있었습니다. 부대원이 40명 정도였는데 한 번 전투를 치르면 17명 정도밖에 안 남았습니다. 제가 그중 한 명이었습니다.”
영국 동쪽 노스요크셔의 스카버러에서 한국전쟁 참전용사 케네스 켈드(89)를 만났다. 성성한 백발에도 말끔한 옷차림에 차분한 말투가 인상적이었다. 전쟁의 참극을 겪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온화하고 푸근한 할아버지의 모습도 엿볼 수 있었다.
“저는 1934년 3월 14일 이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요크셔의 동쪽에 위치한 포터 브롬턴에서 태어나 살았습니다. 15살까지 학교에 다녔고 이후 처음으로 구한 일자리는 농장 등을 짓는 건설 업체였습니다. 18살이 되자 의무 복무를 위해 입대했죠.”
■“너는 한국에 갈 거야!”
케네스 켈드가 한국전쟁에 참전했을 때 당시 사진. 케네스 켈드 제공
1952년 4월 17일 케네스는 입대해 16주간 기초 군사 훈련 등을 받았다. 자대에 배치되고 이튿날 상관과 군 생활과 관련해 면담했다. 그의 상관은 직업 군인으로 복무하는 게 어떠냐고 물었다. 그의 대답은 ‘아니요’ 였다. 그러자 상관은 ‘너는 한국에 갈 거야!(You’ll go to korea!)’라며 윽박질렀다.
■후크 고지의 영웅들
케네스 켈드가 부산에 입항했을 때 타고온 배에서 군인이 내리는 모습. 케네스 켈드 제공
케네스는 이곳에서 소총수 임무를 맡았다. 보초를 많이 섰고, 정찰도 자주 나갔다. 정찰 작전이 있을 때면 적군이 있을지도 모르는 지역으로 들어갔다. 적군을 맞닥뜨릴 수도 있고, 지뢰밭으로 들어갈 수도 있어 긴장된 분위기가 지속했다.
“정찰 땐 3명이 나갔습니다. 우리도 그렇지만 적군도 조우하길 원치 않았죠. 적군을 발견하면 부대로 돌아와 알리는 게 주 임무였습니다. 정찰하면서 다행히 적군을 만난 적은 없습니다. 그래도 적군이 수시로 지뢰 위치를 옮겨놔 두려웠습니다.”
매일 밤 후크 고지를 향한 적의 포격도 이어졌다. 이곳에 있는 모든 군인은 매서운 포격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침묵 속에서 다 같이 어쩔 수 없는 공포를 느꼈다. “중공군이 후크 고지를 빼앗기 위해 계속 포격했습니다. 한 번은 중공군 한 명이 투항하기도 했는데, 정보를 제대로 전달해 주지 않아 매일 포격에 대비해야 했습니다. 당시 우리보다 중공군이 5배나 많았던 게 기억 나기도 하네요.”
케네스 켈드가 2021년부터 자신의 한국전쟁 이야기, 전우의 참전 수기 등을 엮어 발간한 책들. 김태훈 PD
가장 참혹한 순간은 전우를 잃을 때였다. “처음 전우를 잃었을 때 특히 더 힘들었습니다. 한번 전투가 벌어지면 우리 부대원 40명 중 살아남는 전우는 17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중에 제가 한 명이었죠. 전우가 전사해도 이걸 잊고 앞으로 나아가야만 살 수 있었습니다.”
■잊지 못하는 전우들
케네스 켈드가 영국 노스요크셔의 스카버러 자택에서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영국 부대 마크를 설명하고 있다. 김태훈 PD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이 이뤄졌다. 영국군 등 일부 부대는 평화 유지를 위해 이곳에 남았다. 케네스도 그해 11월까지 임진강 인근에서 근무했다. 이후 그는 지브롤터를 거쳐 영국으로 돌아가 1954년 4월 15일 제대했다. 그가 한국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들린 곳이 있다. 바로 전우가 묻힌 부산 남구의 유엔기념공원이다.
그는 전우를 끝까지 잊지 않을 것이란 말로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한국전쟁 참전용사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함께 돌아오지 못한 전우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그의 가족을 기억하는 일도 포함됩니다.”